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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史:)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아들들:) 효령대군

by 알풀레드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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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 씨의 차남 효령대군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살펴본 양녕대군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절한 3명의 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5남이라고 할 수 있다. 효령대군은 1396년에 태어나 1486년에 사망했다. 이름은 이보이며, 초명은 이호라고 한다. 12세에 해주 정 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17세에 효령대군으로 봉해졌다. 

 

출처. 효령대군 영정

 

일반적으로 효령대군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말은 형인 양녕대군이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라고 말했다. 즉, 훗날 불교를 독실히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효령대군이 왕자였던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좋게 표현하면 온화한 성품으로 태종의 사랑의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나쁘게 말하면 양녕대군과 충녕대군(훗날 세종)에 비해 여러 가지로 임팩트가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세자를 중심으로 기록이 되었을 것이고 특히 양녕대군이 하두 사고를 쳐서 그 자신이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효령대군과 관련된 야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양녕대군이 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왕세자 자리를 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셋째 동생 충녕대군의 자질이 훌륭하여 그에게 물려주려고 의도한 것이다.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자 효령대군은 갑자기 책을 펴고 공부를 하는 척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양녕은 효령에게 공부하는 척하지 말라고 호통쳤다고 한다. 물론, 이와 관련된 일화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효령대군이 특별히 왕위를 욕심부린 적이 없으며, 개차반 같은 양녕대군이 그런 조언을 했을 리 만무하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태종은 술을 마시는 것은 무익하지만 외교를 할 때나 신하들과 어울릴 때는 어느정도 술을 마실 수 있어야 하는데 충녕을 술을 적당히 마시고... 효령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고 말했다. 즉, 정치적으로 연회를 할 때 신하들과 적당히 어울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정치 센스가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을 품었을 수도 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융통성이나 임기응변이 부족한 효령이 살벌한 정치판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효령이 불교에 심취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불교문화에 심취한 것이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대 사회에서 유자들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가 타락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비판을 했다. 비록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무학대사가 왕사로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예외가 되었으나 후계자가 불교와 관련되었다면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즉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말을 했던 것은 왕실에서 왕자가 불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회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충녕대군이 비록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양녕이 폐위가 된다면 좋든 실던 차기 세자는 효령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분명히 효령의 인품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세종이 왕에 오른 후 형인 효령대군과 원만한 관계를 지속했다고 한다. 효령이 법회를 열거나 불사, 절 중건 등을 할 때 신하들이 세종에게 비판을 하지만 언제나 세종은 형을 비호해주었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동생에게 상당히 골치 아픈 행동을 했다고 한다. 효령이 불공을 드리는 절에서 살생을 하는 등 정신나간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효령은 형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양녕과 효령은 모두 장수 했다. 세종이 죽은 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양녕은 정치적으로 수양을 지지하였으나 효령은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효령은 불교를 진흥시키는 것에 힘을 다하면서 안빈낙도의 삶을 살게 됨에 따라 91세까지 장수했다. 재미있는 점은 장수했던 효령의 아들이 60대였다고 하는데 가족 연회에서 아버지 앞에서 춤을 췄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끝으로 효령대군이 불교와 관련이 높다고 하여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간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왕자로서 불교 증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지 승려가 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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