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의 최후, 선죽교, 단심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의 앞을 가로막았던, 우왕과 최영이 제거된 후 고려 최후의 보루로 포은 정몽주만 남게 되었다. 포은 정몽주는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이성계와 이방원이 마지막 핀치에 올려 결국 제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정몽주는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로 경북 영천 출생으로 알려졌다. 공민왕 재위 기간에 문과에 장원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고려에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들어올 시기 학문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에 스승인 목은 이색에게 '동방이학의 비조'라는 찬사를 들었다. 초기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을 하였는데 명나라와 일본 등을 오가며 뛰어난 외교술로 명태조나 일본인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일본 규슈에 사신으로 가 왜구 토벌의 확답을 받은 후 왜구에게 끌려간 수백 명의 고려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명나라에서 고려에 무리한 조공을 요구할 때 정몽주가 나서서 명태조를 설득한 일화는 전설로 남아있다.
이러한 외교 업적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고, 특히 이성계의 이름을 드높였던 황산대첩 때에 부장으로 활약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주로 행정적인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직접적인 전투에도 참가할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왜구 토벌에 함께 했던 이성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려는 의도를 알게되면서 둘의 관계는 악화된다. 우왕의 폭정과 함께 권문세족으로 인해 고려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정몽주는 이성계를 이용하여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고려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는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근본적으로 체계를 바꾸지 않은 이상 개혁만으로는 현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고려 최후의 보루인 정몽주는 그런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막아 내기 위해 최후의 저항을 시도한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하면서 큰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때를 노려 정도전을 비롯한 이성계 일파를 줄줄이 귀향을 보내는 등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성계가 생각보다 큰 부상을 당한 것이 아니 이성계 일파를 축출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정몽주에 의해 위기감을 느끼게 된 이성계 일파는 그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를 품고 싶어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제거할 필요성을 인지하면서도 끝까지 정몽주를 살려두고 지속적인 만남을 주선했다.
정도전과 이방원 등은 결코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눈치채고, 이성계 몰래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초청하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데... 이방원의 하여가와 단심가가 이 곳에서 등장한다.
이방원 -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칡넝쿨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한평생을 누리니."
정몽주 -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 있으랴"
이방원은 조영규를 비롯한 수하들에게 정몽주를 피살할 것을 명령한다. 정몽주가 죽은 장소는 일반적으로 선죽교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어디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선죽교는 고려의 충절을 지켰던 정몽주가 죽은 전설적인 장소로 인지된다.
이 정몽주의 죽음은 이성계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로 인해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크게 질책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남아있다. 정몽주의 죽음은 조선의 개국이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군사력이 없는 정몽주가 큰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특히나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 것에 큰 부담을 안고 있었는데... 현재로 치면 야당 대표이자 부총리를 암살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니 민심이 악화될까 걱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은 언제든지 포은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정몽주가 죽은 1392년 4월 26일 이후 약 3개월이 지난 1392년 8월 8일 조선이 건국된다. 말 그래도 정몽주는 고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몽주는 비록 고려에 충성을 바쳤지만 훗날 조선의 선비들에게 감명을 주어 충절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