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史:)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아들들:) 양녕대군

알풀레드 2022. 1. 16.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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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에 대해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은 조선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세종이 세자로 책봉되기 전 군호는 충녕대군으로 그의 자질을 알아본 양녕대군이 세자를 양보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이 일화는 잘못 알려진 일화로 실제 양녕대군은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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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양녕대군은 1394년(태조 3년)에 태어났다. 앞서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 씨는 세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함에 따라 양녕대군이 적장자가 되었다. 편의상 양녕대군을 칭하지만 그의 이름은 이제인데, 1404년 세자로 책봉된 후 여라가 지 문제를 일으켜 폐세자가 됨에 따라 양녕(양보, 양도)이라는 봉호를 얻었다. 

 

출처. 대왕 세종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는 세 명의 아들들이 요절하는 바람에 크게 상심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다시 얻은 양녕대군을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또한, 조선 건국한 후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장자 승계 원칙'을 통해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이방원은 왕세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함께 엄청난 기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 용의 눈물

 

하지만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한 성품을 가진 인물로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정치적 판단에 의거하여 외척과 위협이 되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다는 충격 발언을 하게 된다. 태종 이방원의 양위 선언을 했을 때 세자는 '올커니 내가 왕이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덥석 오케이 했다가는 골로 가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도 없는 상황에서 신하들과 함께 양위를 거두어 달라고 석고대죄를 하게 되는데 골병이 들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양위 파동의 스트레스로 세자가 어긋난 것이 아닌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출처. 용의 눈물

 

양녕대군은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것을 좋아해 태종 이방원에게 큰 골치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권좌에 오른 만큼 자신의 업보로 생각하고 가능한 양녕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녕의 비행은 더욱 심해졌고,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곽선의 첩인 어리를 납치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이때 태종이 분노하자 "아버지도 첩이 많으면서 왜 나한테 뭐라고 하냐?"며 대꾸하기도 했다. 또한, 기생들과 어울리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세자를 대상으로 공부하는 자리)을 피하는 행동을 하였다. 

 

출처. 대왕 세종

 

결국 태종 이방원은 왕세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1418년 폐위를 시키는 결정을 하였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폐위된 후에도 양녕대군은 꾸준히 사고를 쳐서 태종은 그를 감시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태종 이방원은 비록 아들을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늘 아들 걱정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출처. 용의 눈물

 

야사에는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이 왕으로서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행을 저질러 스스로 폐위되는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세자 시절에는 충녕을 경계하기도 했고, 각종 비방과 폄하를 했다고 한다. 즉, 왕세자의 자격이 없는 이가 떨어지고, 재능이 있는 충녕대군이 세자에 올랐을 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출처. 대왕 세종

 

비록 양녕대군이 폐위되었으나 왕의 적장자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국왕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신하들은 세종에게 지속적으로 사고를 치고 있으나 그를 벌해야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세종은 쿨하게 형을 용서하고, 서신으로 형에게 사고를 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때 양녕은 자신을 막으면 앞으로 주상을 보지 않겠다는 식의 답장을 했다고 한다. 왕의 권위를 무시한 행위로 역모죄로 몰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만 세종은 좋게 넘어갔다.

 

출처. 대왕 세종

 

이렇게 동생의 배려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양녕대군은 세종에게 큰 비수를 날렸다. 세종이 죽은 후 종친들과 술자리를 나누는 중 수양을 보고 진짜 호걸이라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종이 죽은 후 수양대군의 편을 들기도 했고, 단종을 폐하는 것을 묵인했다고 한다. 그렇게 천명을 누렸던 양녕대군은 1462년 6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시호는 강정이라고 한다. 

 

출처. 대왕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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