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아나키스트, 관동대지진, 영화, 아내, 죽음)
■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열 열사에 대해 살펴보자. 박열은 독립운동가이자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언론인, 시인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한 인물이다. 특히,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함에 따라 민심과 사회질서가 무너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재난을 틈타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와 폭탄 등 각종 테러와 강도짓을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일본인들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향하도록 조장하였다. 이 시기 박열은 '박열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22년 간 투옥한 후 출소했다.
■ 생애
박열은 지금의 경북 문경에서 박영수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업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상주시 함창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해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을 배달하면서 세이소쿠 가쿠엔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1920년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최초의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했다. 1921년 정견 차이로 공산주의자인 김약수의 북성회와 아나키스트가 이끄는 풍뢰회로 분리된다. 1923년 4월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여러 동지와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반일활동을 주도했다.
■ 관동대지진(간토 대지진)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후 일본 사회는 매우 험악해졌다. 그러던 중 1923년 10월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취조 도중 박열이 폭탄을 구매할 계획이라는 것을 알아낸 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으로 날조한 것이다. 이 사건을 대역 사건이라고 불렀다.
재판 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첫 공판 당시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했다. 또한, 자신은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이므로 조선말로 재판을 받을 것이니 통역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두 사람은 1926년 3월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박열과 가네코는 옥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옥중 결혼식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매우 흥미를 끌었다. 일본 언론은 두 사람의 사진이 중범죄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라며 집중 보도 했다. 이 사진이 일본 전역에 알려지면서 다테마스 판사와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총사퇴를 부를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그리고 얼마 후 1926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2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설과 당국의 암살이라는 설이 있다. 후미코의 시신은 경상북도 문경시에 안장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동안 복역한 끝에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되었다.
■ 광복 이후
광복 이후 도쿄에서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했고, 김구 선생에게 부탁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 송환을 책임지기도 했다. 반공주의 노선의 신념을 밝혔고, 신조선건설동맹은 타 우파 단체들과 통합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이 발족하였다. 김구와 이승만이 점차 불화로 인해 분열의 조짐이 일어나자 화해를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리고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북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것이기 때문에 박열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언론은 이를 보도했고, 추도식이 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