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영창대군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는 아들들 중 광해군과 영창대군과 관련된 비운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선조가 국정을 다스리는 기간에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평화로운 시대를 유지하던 조선군은 전쟁 초기 속절없이 연패를 하면서 한양까지 왜군에게 빼앗겼다.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고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명나라로 도망갈 생각까지 했다.
전쟁 발발 후 빠른 판단 능력(?)으로 파천을 한 선조가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일본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했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의 반대로 명나라로의 망명은 무산되고, 명나라의 원군이 도착하자 평양성을 탈환하기 위해 왕실과 종묘사직에 대한 모든 권한을 세자였던 아들 광해군에게 넘겼다. 당시 왜군은 전국을 통일한 후 바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에 전투력은 동아시아 최강의 위력을 자랑했다. 즉, 광해군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광해군은 평야성 탈환에 성공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놀라운 능력을 보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면서 한양을 되찾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왕으로서 무능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들 광해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라는 두려움과 질투심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양위 소동을 벌이는 등 필사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1600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 없이 죽자 인목왕후가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당시 선조는 51세, 광해군은 28세였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영창대군을 낳았는데, 광해군이 서자인데 비해 영창대군은 적자였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영창대군을 우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왕위를 계승한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한다.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후계자를 지목한다는 교지를 탁소북의 영수이자 권신이었던 류영경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고의로 감추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에 대해 상당히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613년 소양강에서 유흥을 즐기던 서양갑, 박응서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옥에 갇힌 이른바 '칠서의 옥'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이이첨 등 대북파는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배시켰다.
영창대군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고, 광해군 주도로 어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영창대군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아사, 증살, 독살, 병사 등 죽음에 대해서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있지만 영창대군의 죽음은 훗날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는 명분으로 작용된다. 이를 '폐모살제(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라고 칭했다. 그리고 인목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광해군을 증오하면서, 지속적으로 목숨을 노렸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