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한국史:)조선시대

조사의의 난(+함흥차사의 유래, 이방원과 이성계의 갈등)

알풀레드 2022. 3. 14.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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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강 씨의 친척으로 조선 전기 반란을 일으켰던 조사의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정안군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을 살해한 후 정권을 손에 틀어쥐었다. 세자 이방석의 죽음을 안 태조 이성계는 크게 낙담하였고, 정안군 이방원을 미워하게 된다. 차남 이방과가 세자 자리에 오른 후 조선의 제2대 국왕에 오르게 되고, 회안군은 박포의 꾀임에 넘어가 대권을 노리지만 정안군 이방원에 의해 패퇴한 후 유배를 떠난다. 2차 왕자의 난의 결과로 정종에게 양위를 받아 조선 3대 국왕 태종으로 등극했다. 

 

출처. 태종 이방원(좌: 이방원, 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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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라는 인물은 1393년 형조에서 의랑을 지냈고, 1397년 첨절제사 등을 지냈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방원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나면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신덕왕후 강 씨에 대한 미움이 반영된 것이다. 다만, 태상왕 태조 이성계의 뜻을 존중하여 동북면(함경도) 지역으로 보내게 된다.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 씨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분면 지역의 호족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출처. 태종 이방원(좌: 이방원, 우: 이성계)

 

당시 태조도 함흥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박순, 송류 등을 파견하여 태조를 다시 모셔오려고 했으나 조사의는 조정에서 보낸 이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것이 함흥차사의 유래가 된다. 조사의의 반란 초기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며 평안도 덕천, 안주 방면을 점령한다.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데 힘쓴다. 그리고 이숙번에게 4만 명의 진압군을 주어 반란군을 토벌토록 하였다. 

 

출처. 태종 이방원

 

반란군은 이숙번의 진압군에게 대패하였고, 조사의는 함경도 안변에서 아들 조홍과 함께 진압군에게 사로 잡혀 주살되었다. 조사의의 난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매우 부실한 편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다양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가설 중 태상왕 태조 이성계가 이방원에 대한 적개심으로 조사의를 충동질 한 부자간의 대결로 보는 경우도 있다. 가설에 대한 근거로는 신덕왕후 강 씨나 조사의는 함흥과는 연고가 없는 지역이기 때문에 반란의 근거지로 삼기에는 사실상 무리가 있다. 그리고 동북면은 이성계가 군벌로 성장했던 지지기반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켰을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출처. 태종 이방원

 

그리고 태종 이방원의 입장에서 반란군의 수괴를 아버지로 기록할 수 없어 조사의를 모든 반란의 원흉으로 만들어 처형했다. 이복동생을 죽인 이방원의 입장에서 아버지와 싸우는 패륜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대중매체에서도 이와 관련된 가설을 따라 이성계와 이방원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만, 진실은 알 수 없으며 상황에 대비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조사의의 난 이후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은 완전히 소멸된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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