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대표적인 지도자 김개남 장군에 대해 살펴보자. 김개남 장군은 전봉준, 손화중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전주성을 점령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던 인물이다. 다만, 전봉준, 손화중 등과 노선이 갈려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전봉준과 손화중에 비해 반 봉건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김개남은 1853년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현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김대흠과 익산 이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영주였으나 훗날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무렵 조선의 남쪽을 새로 열자는 의미에서 '개남'으로 고쳤다. 중농 가정에서 선비 대우를 받던 집안이라 기본적인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 친화력과 담력을 겸비하여 개구장이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20대 후반의 나이가 된 김개남은 전봉준과 친분을 쌓고, 30대가 되어서 동학을 접한다. 이 시기 전국을 떠돌던 김개남은 다양한 경험을 했고,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과 인연을 맺었다. 동학의 시천주신앙과 후천개벽사상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에 힘썼다. 1891년 두령, 즉 태인 지방의 접주가 된 김개남은 호남 지방 접주들과 자주 접촉하여, 고부 접주 전봉준, 무장 접주 손화중, 금구 접주 김덕명, 주산 접주 최경선 등과 각별한 친교를 맺는다.
1892년 전국 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모여 탐관오리의 제거와 교조 신원을 위한 시위 운동을 펼쳤을 때 호남 접주들과 함께 수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 호남 지방의 동학 지도자가 되었다. 보국안민과 척왜양 깃발을 내걸고 민중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였으나 동학 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돌아오면서 결국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1894년 전봉준이 고부민란을 일으키자 손화중과 함께 1,300여 명의 군사를 일으켜 4월 백산에 동학운동 본부인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동도 대장으로 추대한 후 총관령 직을 맡았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초기에는 정확한 병력 규모와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주화약 후에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시기 김개남은 천민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양반과 같은 기득권층을 주로 공격하는 등 강경적인 행동을 보였다.
김개남의 이런 개별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양반들은 동학농민군을 미워하게 되었고, 민보군이라는 민병대를 만들어 동학농민군과 교도들은 탄압하였다. 일본의 침략으로 자주권이 넘어가는 시기에 계층 간 내분이 일어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 화약이 체결되면서 농민군은 일시 해산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남원, 임실, 장수, 무주 등에서 농민 자치 행정을 펼쳤다.
김개남이 관리하는 집강소는 다른 곳에 비해 반봉건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에 협조를 하던 지역 수령들이 점차 그를 외면하였다. 특히 양반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이에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흥선대원군의 명령에도 양반들의 민보군은 일본에 협력하여 김개남을 토벌코자 하였다. 하지만 김개남은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군사를 움직여 청주 방면(청주성 전투)에서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의 군대는 와해되었다.
정읍 태인으로 피신하여 오랜친구인 임병찬에게 구명을 부탁한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유인한 후 고발하여 결국 관군에게 체포된다. 전주에서 이도재의 심문을 받은 후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고 현지 처형을 당했다. 서교장에서 처형당한 뒤 배를 갈라 간을 큰 동이에 담았는데, 보통 사람의 것보다 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개남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은 그의 고기를 빼앗아 씹기도 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황헌의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근대적인 군대로 개편된 일본의 침략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김개남이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고 좀더 냉정하게 판단하여 전봉준과 협력하였다면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말해서 근대화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1%의 가능성이 있는 희박한 일이었으나 새로운 불꽃을 피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상황을 판단해 보았다.
김개남이 처형당하면서 반란군으로 찍힌 그의 집안은 힘든 삶을 살게 되었다. 후손들은 김개남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불태워야 했고, 역전의 핏줄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동학농민운동이 재평가됨에 따라 후손들도 당당히 고개를 들고 살 수 있게 되었다. 반면, 김개남이나 동학농민군에게 피해를 당한 후손들은 그들은 역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아래 사진은 김개남의 사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효수된 사진의 얼굴이나 초상화와 이미지가 달라 여러 가지 논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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