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대 국왕 정종...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차남인 이방과에 대해 살펴보자. 용의 눈물을 즐겨봤던 시청자들이라면 이 이방과라는 인물은 순박하고 겁이 많은 인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동생 방원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고,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라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최근 드라마에서는 무인 출신인 이방과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좀 더 부각하고 있다.
과연 이방과는 어떤 인물일까?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 및 홍건적을 무찌르며 전공을 세울 때 약관의 나이로 유일하게 아버지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 바로 이방과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종 실록 편에는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공경하며, 용맹과 지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한다. 고려에 벼슬하여 관직을 거듭해서 장상에 이르렀고, 항상 태조를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고 기록되었다.
그 유명한 황산 대첩에도 참가한 이력이 있으며, 위화도 회군 때 형 이방우와 함께 우왕 진영을 탈출하여 신속히 이성계의 진영에 합류했다. 이방과는 형제들 가운데 차남이지만 사실상 이성계의 후계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우선 장남인 진안대군 이방우는 젊은 나이에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예의판서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경에 있는 가문을 이끌어야 했다. 이성계의 근거지는 동북면의 영지로서 유사시 가별초를 이끌 수장이 바로 차남 이방과로 낙점된 것이다. 그래서 형제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건국 후 1392년 8월 이방과는 35세의 나이로 영안군에 봉해졌다. 당시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의 의흥친군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실권은 모두 정도전, 남은 등이 장악하게 되자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1393년 문화현과 영녕현에 왜구가 출몰하자 직접 군사를 끌고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까지 영안군 이방과는 군인으로서 무인다운 모습을 마음껏 뽐냈다.
1398년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동복형 이방번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방원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강제로 장자 계승을 근거로 차남 영안군 이방과가 세자에 책봉되었다(1394년 장남 진안대군은 사망한 상황이었다). 당시 영안군 이방과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 공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며 극히 사양했다고 한다.
하지만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책봉된 후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은 왕좌에 올랐지만 실권이 없어 언제나 동생의 뜻에 따라야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자신은 권력에 뜻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재위 기간(1398년 10월 14일~1400년 11월 28일) 동안 격구나 사냥을 즐겼다. 그러던 중 넷째 동생 이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동생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방간은 형제들 가운데 우애를 가장 중요시 했으며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간이 난을 일으키자 방원에게 그의 목숨만을 살려주기를 간곡히 부탁을 했다. 또한, 아버지 이성계를 극진히 모시기도 했다.
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된 후 1400년 11월 재위에 오른지 2년 여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후 19년 동안 유유자적 한 생활을 하다가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 한참을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에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고 한다. 즉 정종은 조선 전기에 왕의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실권 없는 왕의 비참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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