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사남 회안대군 이방간에 대해 살펴보자. 회안대군 이방간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 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판서찬성사 민선의 딸과 결혼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회안군에 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당시 삼남 이방의와 함께 자리를 지켰다. 무인으로서 기질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드라마에서 동생 방원을 매우 시기 질투하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형들과 마찬가지로 이성계가 왜구나 홍건적 등을 토벌할 때 일부 참여를 했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일부 사서에서는 둘째 이방과는 전장에서 참여한 기록이 있으며, 이방간은 동북면의 가별초를 통솔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들들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대부분 조선이 개국된 후 이야기가 다뤄지고 있어 고려 시절의 행적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방간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이 인정되어 회안공이 되었다. 형 이방과가 조선 2대 국왕으로 등극하고 조정의 최고 권력이 이방원에게 집중되면서 불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방간은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1400년 논공행상에서 불만을 가졌던 박포가 이방간을 찾는다.
박포는 1차 왕자의 난 때 조전 절제사로 있다가 이방원에게 가담해 정도전 일파의 동정을 정탐한 공이 인정되어 2등 공신에 봉해졌다. 하지만 스스로 1등 공신이 될 만큼의 공을 세웠다고 판단했는지 큰 불만을 토로했다가 유배된 인물이다. 박포는 이방간을 충동질하여 이방원과 싸우도록 하면서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간은 동생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진압군에게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진압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 형제들 가운데 누구도 이방간을 지지한 사람이 없었다. 이미 대세가 이방원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거병을 일으킨 이방간은 명분이 매우 취약했다. 오죽하면 이방원을 증오하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조차 깜냥이 안된다는 소리를 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자살행위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이미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방원은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차마 형제를 죽일 수 없다고 하여 모든 죄를 박포에게 씌웠다. 만약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부분에서 방해가 되었다면 이방간을 제거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대세는 이방원이었기 때문에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을 때 박포는 참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정치적 희생양이 된 셈...
이방간은 왕권에 대한 야심이 대단했지만 야심에 비해 능력이 모자란 인물로 볼 수 있다. 성격이 매우 괄괄한 편이라고 하는데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진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채 병사를 일으켰다. 이방간은 1401년 작위 제도 개정으로 회안대군이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이방간의 처우를 두고 신하들에게 사사할 것을 건의 받았는데 그때마다 물리쳤다. 역모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58세의 일기로 홍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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