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중 이성계의 아들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성계는 신의왕후 한씨로부터 6명의 아들을 신덕왕후 강씨로부터 2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첫째 아들인 진안대군 이방우에 대해 살펴보자.
이방우는 1354년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자로 태어났다. 방우는 어려서 효자로 이름을 알렸고 형제들과의 우애가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는 이성계가 정치적으로 충주 지씨 가문과 결합을 의미한다.
이방우는 일찍이 벼슬에 나아가 예의판서(조선의 벼슬로는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장인인 지윤과 아버지 이성계의 후광으로 음서를 통해 나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성계가 아무리 고려의 영웅으로 부상하였더라도 무신 출신으로 중앙 정계로 나아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고, 이때 충주 지씨 가문과 결합을 통해 이를 어느 정도 해결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방우와 함께 이성계의 둘째 아들 이방과 역시 충지 지씨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다.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때 이방우는 동생 이방과, 이화상, 유용생 등과 함께 이성계가 있는 진영에 합류하였고, 쿠데타 성공 후 11월에 밀직부사로 밀직사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를 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방우는 진안군에 책봉되었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으로 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지병으로 인해 4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술을 좋아해 날마다 술을 마시는 것을 일로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각종 드라마나 소설에서 진안대군 이방우는 고려에 충성을 한 충신으로 대접받고 있다. 다만 정사 기록인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진안대군 이방우가 고려에 충성을 바쳤다고 하는 내용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왜 이방우는 고려의 충신이라는 이미지가 생겨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개국공신 이지란의 청해백집에 근거하여 위화도 회군 당시부터 아버지를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는데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절망해 술로 매일을 지내다가 병이 났다고 설명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이방우가 고려의 충신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그이유는 위화도 회군 당시 우왕 진영을 탈출해 신속하게 이성계 군영에 합류하였고, 우왕이 폐위된 후 창왕이 즉위하자 명나라의 사신으로 갔다. 즉 아버지 이성계의 권력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 노력을 한 것이다. 다만, 각종 매체나 드라마에서는 이성계가 역심을 할 뜻이 없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바로잡기 위해 도운 것이라는 설명이 붙지만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대세나 당시 상황에서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고려에 대한 충심이 남아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합리적인 추론을 해보자면 이성계의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울분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춘다. 고려에서 이성계는 중앙 진출을 하기 위해 고려의 명문 귀족과 친분을 다졌지만 조선 개국 이후 고려의 잔재는 부담스러운 유산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 개국 후 세자 책봉을 이방석을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이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결국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는데 만약 이방우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2대 국왕은 이방과가 아니라 이방우였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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