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인물인 이성계에 대해 살펴보자. 이성계는 고려 말기 혜성처럼 등장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안정한 왕권으로 고려 왕조는 매우 위태한 상황을 거듭했다. 이때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이 결탁하여 힘을 기르다가 요동 정벌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고려 사회는 기본적으로 왕권이 성립할 때 지방 호족들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다. 지방 호족들은 서로 간 정략결혼을 통해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고려 왕권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했다. 이들은 으머와 공음전을 통해 부와 권력을 세습하였고, 이 중에서 5품 이상의 관료가 3대 이상 배출된 가문들이 등장함에 따라 이들을 문벌 귀족이라고 불렀다.
문벌 귀족은 사회 특권 계층으로 고려 사회를 지배하면서 무신들에 대한 차별을 해왔다. 시대를 거듭할수록 무신들은 문벌 귀족에 대한 혐오감을 키워왔는데 의종 시대에 와서 무신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때 수많은 문벌 귀족들은 무신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무신정권이 몰락하기 전까지 숨죽여 지내왔다.
무신정권 몰락 후 살아남은 문벌 귀족들은 권문 세족으로 변화되어 관료계를 장악한다. 권문세족은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백성을 수탈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양민에서 소작농이 되었고 조세가 줄어듬에 따라 국가 경영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권문세족에 반발한 세력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이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황산 대첩으로 고려의 영웅이 된 이성계와 정치적으로 결탁하면서 강력한 힘과 명분을 얻게 된다.
이성계가 고려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원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고려의 공민왕이 반원 자주 정책을 시도할 때이다. 아버지 이자춘을 따라 고려에 귀순한 이성계는 왜구를 격퇴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전주 이씨 가문의 수장으로 가별초라고 불리는 최정예 사병집단을 이끌게 된다. 이 가별초와 함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고, 특히 활을 잘 쏜 이성계는 신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표적으로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가별초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승리하면서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성계는 원나라 군벌 나하추를 격파하는 등 고려의 영웅 최영과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특히, 황산 대첩이라고 불리는 왜구와의 전투에서 적군 장수 아기발도를 죽여 승리를 거둠에 따라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때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낸 후 중원을 장악한다. 원나라는 요동으로 밀려나게 되고 결국 명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명나라와 고려는 국경을 마주하게 되고 외교적으로 마찰이 시작된다. 특히, 명나라는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가 있던 철령 이북의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함에 따라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고려의 장군 최영은 명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요동을 공격할 것을 조정에 건의한다. 고려의 우왕은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을 지지하였고, 고려의 명장 이성계에게 자문을 구한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사불가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고,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되고, 3) 군사를 동원하는 순간 왜적이 침략할 것이며, 4) 장마철에는 전염병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왕은 요동 정벌의 뜻이 확고하여 결국 요동 정벌을 단행한다. 당시 요동 원정군은 약 4만에 이를 지원하는 병력이 1만1천 등 약 5만의 군대가 동원된다. 요동군의 총사령관은 최영이 되었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조민수와 이성계가 최영을 도왔다. 요동군은 압록강으로 진출하자 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쪽에서 각 지역을 유린하였다고 한다.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는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하였지만 물이 불어나 군대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당면하였고, 군량미가 떨어져 요동까지 가기도 힘들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조정에 현재 상황을 알리며 회군을 주장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거절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군사를 돌려 회군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회군 결정은 결국 반역이었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하는 순간부터 급속행군을 하여 최영 장군이 이끄는 부대와 개경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미 요동군의 고려 최고의 정예군으로 최영 장군이 이끄는 방어군이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영 장군이 이끄는 방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고려 조정을 장악하고 정도전과 함께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의 아들들의 활약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후계자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성급한 결정을 함에 따라 말년에 상당히 못볼꼴을 보게 된다. 즉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들은 큰 전과를 거둔데 비해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은 전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막내로 결정했다. 만약 막내인 이방석을 후계자로 세웠다면 그에 대한 철저한 안배를 해놨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런 왕자의 난에 대한 부분은 추후에 살펴보자.
이성계의 아들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아래 태조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부인 6명, 자녀가 8남 5녀가 있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성계의 아들들은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는 슬하에 5남 2녀가 있으며, 신덕왕후 강 씨는 2남 1녀가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신의왕후 한 씨의 아들들이 수많은 공을 세웠으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아무런 공이 없는 의안대군 이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가장 반발한 인물이 정몽주를 격살하여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방원이다.
이성계의 첫째 아들은 진안대군 이방우이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고려에 대한 충정을 저버리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반발하여 은거하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최근에는 이방우는 정치적으로 후계구도에서 밀려 이에 대한 울분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논의된다.
이성계의 둘째 아들은 영안대군 이방과로 이방원에 의해 조선 2대 왕에 오른다. 호랑이 같은 동생 이방원 때문에 엄청나게 마음고생했다고 한다.
이성계의 셋째 아들은 익안대군 이방의다. 형제들의 싸움에 중립을 지켰다고 하지만 간접적으로 이방원을 지지했다.
이성계의 넷째 아들은 회안대군 이방간이다. 형제들 가운데 가장 문제의 인물로 2차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다. 박포와 함께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만 이방원에게 패한 후 사사될 뻔 하지만 이방원은 끝까지 형제를 죽이지 않았다.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은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이 있다. 세자로 책봉되기에는 정국이 어수선하였기 때문에 너무 어린 나이에 지지기반 없이 의안대군 이방석이 책봉되어 화가 일어났다. 신덕왕후의 두 아들은 이방원에 의해 사망한다.
'▶역사 > ▷한국史:)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계의 아들들:) 회안대군 이방간 (0) | 2021.12.18 |
---|---|
이성계의 아들들:) 익안대군 이방의 (0) | 2021.12.17 |
이성계의 아들들:) 진안대군 이방우 (0) | 2021.12.12 |
태조 이성계의 책사:) 삼봉 정도전 (0) | 2021.12.08 |
태종 이방원 소개, 무인정사(왕자의 난), 가계도 (0) | 2021.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