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와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이자 일곱째 아들로 태어난 무안대군 이방번에 대해 살펴보자. 이방번은 고려 시절 어린 나이에 고공좌랑(고려 시대에 고공사에 속한 정육품 벼슬)에 올랐고, 고려 최후의 왕 공양왕의 동생인 귀의군 왕우의 딸 경녕옹주 왕 씨와 결혼했다. 이렇게 방번이 어린 나이에 높은 벼슬을 얻고 왕족과 결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덕왕후 강 씨의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로 보인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 우왕이 이성계의 가족들을 볼모로 삼으려 하였지만 포천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무안군에 책봉되어 의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된 후 세자 책봉이 될 뻔하였으나 조준, 정도전 등 조정 대신들이 "방번의 성격은 거만하고 경솔하다"라고 하여 반대했고, 그의 동생인 이방석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방번이 세자에 책봉되지 못한 이유는 사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씨 일족을 몰아낸 조선의 세자를 책봉하는 데 있어 이방번의 혼인 관계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이방번은 공양왕의 조카딸과 결혼한 상황에서 공양왕을 몰아낸 이성계... 그리고 공양왕의 형제가 장인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을 받지 못한 방번은 1393년 좌군 절제사가 되었고,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면서 동생 이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당시 나이는 18세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기 전 이방원은 무안대군 방번을 포섭하려고 했다. 하지만 방번은 동생을 쳐야 한다는 사실에 찝찝함을 느꼈는지 합류하지 않았다. 반면,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도 알리지 않고 현 상황을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방원이 신덕왕후 강 씨를 평생 미워한 사실로 미뤄봤을 때 방번 역시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가진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방번은 내제 이제, 이복형 이방과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로 임명되었고, 이방원이 거르기고 있던 동북면 가별초까지 인계받았다고 하니 상당한 사병을 보유했을 것이다. 당시 이방번이 이방원에게 합류를 하든 혹은 이방원에게 대항을 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으나 결국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18세의 나이로 전장 경험이 없는 방번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 있겠냐만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방번이 세자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방석이 죽으면 자신이 세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왕자의 난 이후 방번이 죽을 이유는 크게 없었다. 사실 이방원의 진영에 합류를 했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겠지만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무안대군 이방석은 후사 없지 죽었기 때문에 세종 대 다섯 번째 아들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전해였으나 광평대군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면서 후사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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