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소현세자는 조선 16대 국왕 인조와 인열왕후 한 씨의 장남이자 17대 국왕 효종의 형이다. 조선 중기 사도세자와 함께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로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 생애
1612년(광해군 4년) 1월 26일 능양군(훗날 인조)과 청성현부인 한 씨(훗날 인열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소현세자의 어린 시절 불린 아명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훗날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 원자되었고, 1625년 왕세자에 책봉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소현세자가 된다. 그리고 2년 후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전주로 내려가 남도의 민심을 수습했으며, 그 해 참의 강석기의 딸 민회빈(강빈)과 혼인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은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우선,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반정공신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대외적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면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의 틀을 깨버린 것이다. 문제는 광해군의 세력을 몰아내고 조정과 사회를 안정시켜 자신들의 정치사상을 펼치려 했으나 "이괄의 난"이 발생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오죽하면 내부 반란으로 국왕이 한성을 버리고 도주를 했다.
이괄의 난의 영향으로 민심이 혼란스러워졌고, 북방 주력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후금은 광해군 폐위 사건을 명분삼아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당시 소현세자는 열여섯 살의 나이로 전주에 내려가 분조(조정을 나누어 국왕의 임무 일부를 내어주는 행위)를 하였는데,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기록이 남는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능력을 인정한 것인지 정묘호란이 끝난 후 엄청난 양의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공부는 시류에 어긋난 행위였을 뿐이었다. 1636년(인조 14년) 조선은 청나라과 명나라 사이에서 여전히 명나라를 지지함에 따라 병자호란이 발생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으나 청나라군에게 패배해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된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척화파 대신들 그리고 백성들이 인질로 청나라에 잡혀간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8년간 머무르면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조선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아마 처음에는 포로로서 상당히 치욕적인 상황을 겪었으나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력으로 청나라 고관대작들과 친분을 쌓았다. 청나라에서 조선인들이 노예 시장에 있는 것을 본 소현세자와 강빈은 돈을 구조 구출하거나 농장을 만들어 곡물로 장사를 해 상당한 재물을 얻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가 친청 행위로 인조에게 상당한 반감을 사게 된다. 결정적으로 조선의 문제를 인조가 아닌 소현세자와 논의하고 결정하게 되는 상황까지 가게 되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정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는 서양 문물에 심취해 천주교 신부와 친교를 맺거나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조선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청나라를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조선이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것이다. 오죽하면 청나라에 항복했던 명나라 문인 범문정은 "조선 왕을 끌어내고 세자를 세웠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 죽음
이러한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인질생활을 마치고 1645년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인질생활을 마치게 된 배경에는 명나라가 멸망하게 됨에 따라 더이상 조선의 인질이 필요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나라를 위해 포로생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냉대했다. 세자 일행은 북경에서 조선을 더욱 발전시킬 서양 문물을 가져왔으나 인조는 청나라에 대한 증오로 소현세자를 더욱더 증오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조의 총비 조소용은 세자를 백방으로 모함하면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3달 만에 학질로 돌연 세상을 떠난다.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드러누웠고, 와병한 지 3일 만에 의문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했고, 뱃속에서 피가 쏟아졌다는 기록에 따라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증거는 세자빈 강씨와 세 아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원칙적으로 세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후계자는 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후계자가 되지만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생각한 인조는 세자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제주도에서 병에 걸려 죽는다.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소현세자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소현세자는 강빈은 3남 5녀를 두었으며, 소현세자 사후 유산한 넷째 아들까지 포함하면 4남 5녀이다. 소현세자의 가계는 경선군과 경완군이 어린 나이로 사망함에 따라 끊길 뻔하였으나 경안군이 살아남아 대를 이었으며, 그 후손들이 오늘날 전주 이 씨 소현세자파로 남았다고 한다.
경선군 | 제주도에서 돌림병으로 사망 | |
경완군 | 제주도에서 돌림병으로 사망 | |
소현세자 | 경안군 | 제주도에서 유배 후 방면되었으나 23살의 나이로 요절 |
경숙군주 | 구봉장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둠 | |
강빈 | 경녕군주 | 박태정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둠 |
경순군주 | 자녀들 중 가장 장수 | |
요절한 딸 2명 | 첫째와 둘째로 태어났으나 요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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