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이강석 사건
개요
1957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을 사칭한 강성병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삼일 간 대통령의 아들로 행세하면서 지역 유지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당대에는 엄청난 사회적 이슈를 낳았다. 과연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기 전 이강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강석은 당대 서열 2위였던 이기붕의 아들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기붕의 아들로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이승만의 아들로 입적되는 순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태자로 등급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인성이 타락한 인물로 지금으로 치면 베테랑에서 유아인이 연기했던 조태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강석 사칭 사건의 전말
1957년 당시에는 태풍으로 전국이 수해를 많이 입었던 해였다. 특히 영남 지방에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수 많은 건물과 인명 피해가 있었다. 이런 시기에 대통령의 아들이라고 사칭한 이강석이 경주경찰서에 등장해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피해 상황과 공무원들의 기강을 알아보로 왔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아들의 등장에 경주경찰서장과 경주시장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이강석에게 극존칭을 써가면서 극진히 대접한다.
이강석은 경주시장과 경주경찰서장의 대접을 받으면서 경북 지역 일대를 순찰하면서 지역 유지들을 만났다. 이강석은 지역 유지들에게 수재의연금을 좀 내면 좋겠다고 눈치를 주었다. 이에 지역 유지들은 이강석에게 잘 보이기 위해 뇌물을 바쳤고, 이들에게 받은 금품이 무려 50만 환이라고 한다. 당시 1만 환이 쌀 한 가마니 정도 되니 상당한 금액을 뜯어낸 것이다.
이강석은 경주, 영천, 안동 등을 돌아본 후 경상북도청 소재지인 대구로 향했다. 이때 경북도지사 이근직은 이강석과 안면이 있던 사이로 의아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이근직은 이강석과 서울대학교 동창이었던 아들을 불러 확인을 시켰고, 아들은 그가 이강석이 아니라고 확인함에 따라 이강석을 사칭한 청년은 즉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은 이 청년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한 결과 진짜 이름은 강성병으로 확인되었다. 그는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남부러울 게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서울 소재 법대를 지망하면서 공부를 하였으나 대학 입시에서 줄줄이 낙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까지 기울어져버리자 세상을 비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출을 하였고, 그렇게 떠돌던 강성병은 우연히 자신이 이강석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사칭할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가짜 이강석 사건은 경찰들에게 상당한 수모를 안겨주었기에 경찰은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덮으려고 하였다. 특히 당대 제일의 권력을 가졌던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신문의 한 기자가 대구경찰서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집요하게 취재해 이슈화를 시켰다.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 강성병의 재판이 있을 때 방천권을 나눠줘야 할 정도로 많은 방청객이 몰렸다. 또한, 이들로 인해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거나 재판정 내 의자가 파손되기도 했다.
법정에서 강성병은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고 흉내를 내어 보았다"라고 말했으며,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라고 말했다. 관료들에 대한 부패성을 비웃은 것이다. 법정은 강성병에 대해 장난 이상의 다른 의도가 없다고 판단해 징역 10개월이 판결되었다. 그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963년 강성병은 대구 시내 유림옥이라는 술집에서 극약을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진짜 이강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가벼운 장난 정도로 생각했던 일에 대한 사회적 파장이 너무 커져서 심적 부담을 느끼고 그런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짜 이강석은?
가짜 이강석 사건의 진짜 이강석은 어떤 인물일까? 이승만 정부의 국회의장 이기붕과 박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말년에 이승만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후사가 없어 곤란한 처지였는데, 이기붕은 자신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 입양은 당시 민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기에 법적인 효력이 없었다. 하지만 법을 초월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강석은 황태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대통령의 양자이자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편입하였다가 법대생들이 집단으로 거세게 반발해 중퇴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육관사관학교에 재입학하였고, 대한민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은 시내에서 헌병을 구타하거나 난동을 부리는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보도된 적이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만행이 엄청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1960년 이기붕이 부정 선거를 주도하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함에 따라 권력을 잃게 된다. 이에 이강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친아버지 이기붕과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 등을 총으로 죽인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왜 이강석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이들은 이처럼 비참한 몰락을 하게 된다. 당시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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