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왕이자 제34대 국왕 공양왕[재위 기간: 1389년~1392년]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 인기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 공양왕은 떨거지 왕족을 허수아비로 세워놓았으나 의외로 이성계 일파에 작은 저항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군사적 기반이 없는 공양왕의 저항은 이성계 일파에게 무의미했다. 과연 이 공양왕은 어떠한 인물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 복위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가짜 왕을 몰아내고 진짜 왕을 세움)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이로서 조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고 급기야 이들은 역성혁명을 노리게 된다.
공양왕은 제20대 왕 신종의 6세손인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 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다. 이름은 왕요... 처음에 정창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3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이성계 일파는 창왕 폐위 후 차기 왕을 옹립하기 위해 결의를 하는데 이때 표 대결을 벌인 결과 정창군 왕요가 가자 많은 지지를 얻었다. 이성계는 공민왕의 정비 안씨를 찾아아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을 차기 국왕으로 옹립한다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정비 안 씨는 이를 수락함으로써 정창군 왕요는 국왕에 오르게 된다.
공양왕은 자신이 이성계 일파의 허수아비 왕으로 올려진 것을 알고 있었으나 고려를 지키기 위해 나름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일시적으로 이색을 판문하부사에 임명하여 정계로 복귀시켜 이성계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대간에서 창왕의 즉위를 도운 일로 탄핵함에 따라 복귀 한 달 여만에 파직당해 유배되었다.
공양왕은 우왕과 창왕을 신속하게 처형하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당대 사회에서 이성계 일파가 역성혁명을 일으킬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었고, 최영 장군의 죽음은 고려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에게 분노를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동정을 받고 있는 우왕과 창왕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성계는 전왕을 시해했다는 욕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죽음으로 민심이 흔들렸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물론 역성혁명을 성공한 이들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놨을 리는 없을 것이다.
공양왕의 다음 행보는 정몽주와 결탁하였다. 정몽주는 비록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 것에는 찬성을 하였으나 고려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이끌고자 한 인물이다. 고려 왕조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정몽주는 그나마 남아있는 반 이성계 세력을 규합하여 대항하였다.
1392년 공양왕과 정몽주에게 절호의 찬스가 생겼다. 바로 이성계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을 당했는데 한동안 요양을 하는 사이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물들을 줄줄히 탄핵하여 귀향을 보냈다. 이성계의 수족이 떨어져 나간 사이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결정타를 날려야 한다고 하였으나 공양왕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이성계가 회복하여 절호의 기회를 놓이게 된다.
결국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됨에 따라 공양왕은 마지막 힘을 잃어버린 결과를 맞이한다. 물론 공양왕에게도 여러가지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인해 정몽주를 100% 신뢰를 할 수 없다는 점도 있다. 정몽주 역시 이성계 일파에서 떨어져 나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몽주가 고려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였으나 결국 무력이 없는 힘은 강력한 힘 앞에서 무너져버릴 뿐이다. 이성계가 잠깐 쓰려졌어도 그가 가진 세력만으로 고려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심을 했을 것이다. 다만,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칼이라도 휘둘러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몽주 죽은 후 공양왕의 위신은 그야말로 무너져버렸다. 한 일화에 따르면 조회가 진행되는 중에 신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연회에서 술 주정을 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공양왕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무신정권의 사례와 같이 허울뿐인 고려를 지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나라의 군권이 이성계에게 쏠려있는 상황에서 이성계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다.
1392년 8월 7일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으로 이배되었다. 이때 유배지에서 간성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다시 삼척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성계의 명령으로 1394년 4월 50세의 일기로 사사되었고, 훗날 1416년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공양왕은 순비 노 씨에게서 세자 석과 숙녕 궁주, 정신 궁주, 경화 궁주 등 1남 3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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