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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史:)사건-사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

by 알풀레드 2022.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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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젊은 청년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사망한 청년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이다. 박종철의 죽음은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게 되는 6.10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하면서 민주화 열망에 가득찼던 야당과 국민들 그리고 학생들을 탄압했다. 

 

출처. 영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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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폭력과 억압으로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이들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1987년 1월 14일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박종철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수사관들은 1985년 10월에 터진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박종철을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수사관들의 추궁에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답했고, 이에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상대로 고문을 했다. 

 

출처. 영화 1987

 

수사관들은 박종운이 박종철과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박종철을 상대로 옷을 모두 벗긴 후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를 말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물고문 과정에서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의식을 잃었다. 수사관들은 당황하여 즉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의 오연상 의사를 불렀고, 응급처치를 시도하였으나 박종철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출처. 알쓸범잡, 영화 1987

 

오연상 의사가 대공분실에 도착한 후 박종철의 상태를 살폈는데 사건 현장이 물이 흥건한 것을 보고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파악했다. 하지만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심폐소생술을 1시간을 진행한 후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사관들은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시신을 옮기려고 했다. 의료사고로 은폐시킬 목적을 가진 것을 파악한 오연상 의사는 미리 응급실에 연락하여 시신을 국립경찰병원으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안배했다고 한다. 

 

출처. 영화 1987

 

수사관들은 오연상에게 사망진단서를 써 달라고 요청했지만 오연상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해 있었기 떄문에 사체검안서를 써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에게 전달되었고,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 신성호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기사가 나왔다. 기사가 나온 후 문공부는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뒤집어 놓았다. 

 

출처. 영화 1987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점차 수면에 떠오르게 되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5.18광주민주화운동 7기 기념 미사 때 내막을 폭로하였다. 경찰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박종철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언론에 한 대학생의 억울한 죽임이 보도됨에 따라 1월 16일경 치안본부 특수수사대가 사건 수사에 착수했고, 경찰 총수인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은 기자회견에서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희대의 막말을 했다. 

 

출처. 영화 1987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고문에 의해 벌어진 사건으로 진실이 밝혀졌다. 고문 경찰들은 구속되어 서울서대문경찰서로 이송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많이 있었기에 2명의 경찰관을 주모자로 지목하여 사건을 축소시키기 위한 꼬리 자르기에 불과했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박종철의 시신은 부검 뒤 서둘러 화장하여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당시 박종철의 부모를 병원에 떨어뜨려 놓고 화장을 감행했다고 한다. 

 

출처. 영화 1987

 

박종철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이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고문 경찰들이 영등포교도소로 수감되면서 기존에 수감되어 있었던 동아일보 해직 기자 이부영이 사건이 축소 조작되었음을 알아채고 이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게 진실을 알렸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영화 1987에서 잘 담고 있다. 

 

출처. 영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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