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만의 비밀이 밝혀졌다. 1986년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연쇄살인 사건의 진실이 드러났다.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 10건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흔히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영화 살인의 추억이 방영되면서 대중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2019년 9월 18일 DNA 대조 결과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이춘재가 일치된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됨에 따라 추가적인 처벌을 할 수 없지만 이미 이춘재는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라고 알려졌다. 돌아보면 화성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시기 주먹구구식 수사와 자질 없는 무능한 일선 경찰들, 증거 없이 용의자를 특정 지은 후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방식 등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최악의 연쇄살인범을 잡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춘재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임이 확인된 후 권일용 프로파일러 등이 그의 자백을 받기 위해 만남을 가졌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0 건과 청주에서 벌인 사건 2건 이외 이춘재로 추정되는 4건의 살인 사건이 있지만 이춘재의 DNA나 유력한 증거가 확인된 건 총 7건으로 알려졌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증거들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춘재가 첫 살인을 저지른 시기는 1986년 9월 14일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에 70대 이모씨를 살해했다. 당시 시신의 하의가 벗겨졌으나 성 폭행의 흔적은 없었다고 하며, 사인은 교살이었다. 2차 살인은 1986년 10월 20일 밤 10시 박씨를 성 폭행한 후 살해하였는데, 10월 23일 농수로의 콘크리트 수로 안에서 발견되었다. 주변에는 범인의 흔적으로 보이는 담배꽁초, 모발, 정액 등이 확인되었다. 3차 살인은 12월 12일로 2차 살인 사건과 비슷했는데, 재갈로 물린 후 성 폭행하였고, 스타킹으로 교살하였다. 4차 살인은 정남면 관항리 농수로에서 맞선을 보고 돌아오던 여성을 살해하였는데, 양손이 블라우스로 뒤로 묶여 있었고 거들이 머리에 씌여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때 혈액형이 B형으로 검출되었으나 피해자 역시 B형이었기에 정확한 결과는 아니였다. 5차 사건은 황계리 논에서 홍모양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는데, 정액과 천조각 음모 등이 발견되었다. 6차 살인 사건 발생과 함께 7차 살인 사건에는 피해자의 몸속에 복숭아 조각을 넣는 등 이상 행위를 했다고 한다. 7차 살인과 9차 살인 사건은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흡사하게 표현되고 있다. 10차 사건 이후 이춘재의 범행은 잠시 멈춘다.
1991년 이후 더이상 연쇄살인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춘재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재되어 있는 살인의 충동을 버리지 못한 것인지 혹은 성 충동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결혼 생활에 불화가 있었고, 이는 결국 청주 처제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청주 처제 살인 사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수법이 매우 잔인한 것으로 확인된다. 어린 처제를 수면제를 먹인 후 몹쓸 짓은 하였고, 살해한 것이다. 이전에는 부인을 무차별 구타하는 등 폭력적인 성향이 버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춘재의 몽타주는 1988년 9월 7일 7차 살인사건 직후 그려졌다. 당시 이춘재는 살인을 저지른 후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 당시 모습이 매우 수상해 보였다고 한다. 이에 버스 기사와 안내양은 잘 기억해 두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몽타주의 얼굴은 실제 이춘재와 매우 흡사했다고 하며, 이춘재의 친모 역시 자신의 아들과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변에 몽타주가 돌아다닌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1차 사건부터 4차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관할 경찰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매우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다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본격 수사를 했지만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춘재는 용의주도한 인물도 아니고 곳곳에 흔적들이 많이 남았지만 과학적인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기에 그 조각들을 모아 풀어낼 능력이 있는 경찰이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들만 남은 채 영구 미제 사건이 되었다. 당시 경찰들은 잡범들을 잡아다 폭행과 고문을 통해 범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자살한 사람들도 많았으며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또한, 윤성여 씨는 고문을 당한 후 자백을 했었고, 꾸준히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 끝에 2020년 12월 17일 무죄가 선고되었고 30여 년 만에 누명을 벗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소름돋는 사실은 이춘재가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때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유영철은 이춘재 같은 살인범은 절대로 살인을 멈출 수 없으며,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교도소로 도피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흉악범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할 텐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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