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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史:)조선시대

태종 이방원:) 의흥친군위란?

by 알풀레드 202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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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의흥친군위라는 용어가 언급되면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자막에는 국왕의 친위부대라고 설명이 되고 있는데, 과연 이 의흥친군위는 어떠한 역할을 한 조직이었을까? 국왕의 친위부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던 군대로 금군이라고 불렸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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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역시 금군이 존재하였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중추원이라고 하는 중앙 관청에서 왕명 출납, 궁궐, 숙위, 군국기무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후 궁궐을 수비할 병력이 필요했는데, 왕권을 교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감이 팽배했다. 이에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들을 의흥친군위로 선별하여 궁궐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출처. 태종 이방원

 

의흥친군위는 태조 이성계와 신생 왕조 조선에게 생명줄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측근 중 최측근을 임명했다. 의흥친군위의 지휘는 절제사가 지휘하도록 하였고, 차남 영안군 이방과와 칠남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신덕왕후 강 씨의 사위 흥안군 이제가 맡았다. 신덕왕후 한 씨 소생의 아들들 중 대표로 이방과가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하였고, 신의왕후 강 씨의 소생과 사위를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한 점을 미뤄볼 때 힘의 균형이 강 씨에게로 쏠린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한 씨 소생의 아들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지방 절제사로 임명했다. 

 

출처. 태종 이방원

 

의흥친군위 절제사 임명에는 신덕왕후 강 씨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조선 건국 후 가장 시급한 일은 세자 책봉 문제였다. 신덕왕후 강 씨는 조선 건국 전 신의왕후 한 씨가 사망함에 따라 조선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세자에 오를 수 있는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에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후계자로 무안군을 삼고 싶어 했다. 이성계는 중신들과 함께 후계자를 선정하기 위해 논의하였고, 대신들은 무안군은 고려 왕실의 사위였기 때문에 명분이 부족하다 하여 반대했다고 한다. 

 

출처. 태종 이방원

 

대신들의 반대로 신덕왕후 한씨는 통곡을 하였고, 이성계는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성계와 대신들은 팔남 의안군 이방석을 세자로 임명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결국 신덕왕후 강 씨의 뜻대로 자신의 아들이 다음 왕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안군 이방번이 비록 세자의 자리에서 탈락하였으나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한 것은 후계자로 내정한다는 의미를 담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였음을 시사한다. 

 

출처. 태종 이방원

 

초기 급하게 조직된 의흥친군위(의흥친군좌위, 의흥친군우위)는 정도전의 제청에 따라 의흥시위사와 충좌시위사로 개편되었고, 태종 이방원에 의해 응양위, 내금위, 내시위, 겸사복 등이 설치되면서 금군의 전력이 점차 증대되었다.  

 

출처.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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