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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본史:)에도시대

바람의검심의 히무라 켄신 모티브 가와카미 겐사이

by 알풀레드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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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검심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히무라 발도제)의 모티브가 된 막부 말기 실존 인물인 가와카미 겐사이라는 인물을 살펴보자. 가와카미 겐사이는 일본 에도시대 말기 존왕파의 암살자로 막부 말기를 대표하는 검사이다. 흔히 막부 말기 4대 칼잡이로 오카다 이조, 나카무라 한지로, 다나카 신베에를 지칭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무서운 칼잡이가 가와카미 겐사이라고 한다. 

 

출처. 가와카미 겐사이 위키피아, 바람의 검심 영화

 

가와카미 겐사이는 쿠마모토 영주 호소카와 나리모리의 수하로 에도에서 주로 일을 보았다고 한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의 흑선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막부는 미국의 힘에 눌려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 막부의 처신에 분노한 가와카미 겐사이는 구마모토로 돌아와 학업에 정진한 후 다시 에도로 향했다. 

 

출처. 바람의검심

 

1861년 구마모토 가신의 딸 미사와 테이코와 결혼하였는데, 미사와 역시 나기나타를 잘 다루던 인물이었다. 행복한 신혼시절을 보낸 겐사이는 1863년 구마모토 번친병에 선발되어 미야베 테이조와 함께 간부로 추천되었다. 산조 사네토미의 경호를 맡기도 하였는데 1864년 6월 그 유명한 이케다야 사건으로 미야베 테이조가 신선조에 의해 살해당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출처. 바람의검심

 

이 과정에서 7월 11일 공무합체파이자 개국론자의 중진이었던 사상가 사쿠마 쇼우잔을 백주 대낮에 당당히 한칼에 베어버렸다. 이 사건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가와카미 겐사이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2차 조슈 정벌 때 조슈군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867년 구마모토번으로 귀번하였으나 당시 실세가 좌막파였기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출처. 바람의검심

 

유신 후 개국 정책을 내세우던 메이지 신정부는 계속 양이를 주장하던 가와카미 겐사이의 사상을 두려워했고, 1871년 12월에 참수하였다. 사쿠마 쇼오잔 암살 사건 이외 암살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어서 다양한 풍문이 존재한다. 과장되었다는 의견도 있고, 비밀리에 암살한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출처. 바람의 검심

 

가와카미 겐사이는 키가 150cm 전후로 몸집이 작고 살결이 희었기 때문에 얼핏 여성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이 바람의 검심의 히무라 켄신의 캐릭터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준 듯하다. 그는 죽도 검술이 서툴렀으나 진검을 들면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검법은 시라누이류(부지화류)라는 독자적인 검술의 달인이며, 후대 검술가들은 거합술의 일종이지 않았을까?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출처. 신선조 혈풍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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