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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일본史:)에도시대

신선조 1번대 조장 오키타 소지(+바람의 검심)

by 알풀레드 2023.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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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 말기 혼란스러웠던 교토에 혜성처럼 신선조라는 조직이 나타났다. 신선조는 쇼군에 충성했던 준군사조직으로 교토에 상경했던 낭인 집단이었던 로시구미로부터 시작되었다. 천연이심류라는 검법을 사용하는 시골 도장인 시에이칸의 후계자였던 곤도 이사미는 다른 유파의 인물들과 교우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은 훗날 신선조의 주요 간부가 된다. 대표적으로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야마나미 케이스케, 토도 헤이스케 등이 있다. 

 

타올라라 검

 

시에이칸에는 식객 외에 정식으로 입문했던 히지카타 토시조와 오키타 소지 그리고 이노우에 겐자부로가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곤도 이사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최측근 검객으로 활약한다. 이들 중 천재 검사라고 불렸던 신선조 1번대 조장 오키타 소지에 대해 알아보자. 

 

좌: 신선조 혈풍록, 우: 타올라라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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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타 소지가 출생한 해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1842년 혹은 1844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어린 시절 부모가 모두 사망했다. 소지의 아버지는 무츠 시라카와 번의 아시가루 소대장 출신이라 무사 혈통을 인정받았다. 소지가 9살 되던 해 천연이심류 도장, 시에이칸(시위관)에 입문하여 콘도 슈스케(곤도 이사미의 아버지)의 제자가 되었다. 소지는 어린 나이에 천연이심류 면허개전을 받을만큼 뛰어난 자질을 보유했다. 

 

신선조(드라마)

 

무사혈통에 검술 실력마저 뛰어났던 오키타 소지는 곤도 이사미의 신임을 받았으며, 히지카타 토시조의 절친으로 이 셋은 의형제와 같은 관계가 된다. 곤도 이사미는 무사에 대한 동경을 가진 인물로 쇼군의 호위 명목으로 낭사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에이칸 동료들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였다. 하지만 키요카와 하치로의 음모로 낭사대는 분열하였고, 곤도 일파와 세리자와 일파가 결합하여 신선조를 창설한다.

 

바람의 검 신선조

세리자와 카모의 인맥으로 아이즈 번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세리자와 카모는 필두 국장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비행으로 아이즈 번의 후원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곤도 일파는 세리자와 일파를 제거한다. 이때 세리자와 일파를 제거하는데, 오키타 소지 역시 참가했다. 당시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 야먀나미 케이스케, 하라다 사노스케가 함께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람의 검심5

 

곤도 일파가 신선조를 장악한 후 히지카타 토시조는 신선조를 재편하는데, 오키타 소지는 제1번대 조장에 취임한다. 신선조에서 1번대는 가장 험하고 어려운 임무에 투입된 부대로 최정예 무사 집단이었으며, 오키타 소지는 1번대를 이끌고 실패한 임무가 없었다고 한다. 소지가 최초로 사람을 벤 기록은 분큐 3년 3월 24일 밤 키요카와 하치로의 호소에 모인 낭사대 1번대 소속 토노우치 요시오로 전해졌다.

 

바람의검심5

 

오키타 소지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을 앓았다고 하는데,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케다야에서 치열한 격전 중 피를 토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소지가 폐결했으로 신선조에서 이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건강이 악화된 시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케다야에서 소지가 쓰러진 것은 폐결핵이 아닐 탈수증세라는 설이 존재한다.  

 

좌: 바람의 검심(홋카이도 편), 우: 영화 바람의 검심5

 

게이오 원년(1865년) 2월 신선조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탈주함에 따라 추격대로 파견되어 그를 체포하였고, 직접 그의 할복을 도왔다. 신선조 원년 멤버인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탈주했다가 할복한 사건은 내부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소지 역시 형처럼 따랐던 인물이기에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람의검심

 

1867년경 오키타 소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짐에 따라 도바 후시미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오사카에 후송된다. 그리고 형처럼 따르던 곤도 이사미가 소지를 문병하자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로부터 1년 후 곤도가 신정부군에 붙잡혀 처형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곤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소지는 곤도를 뒤따르듯 2개월 후 세상을 떠난다. 이때 나이가 25~27세로 여겨진다.

 

바람의검심5

 

신선조는 역사의 패자로 메이지 시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시바 료타로의 작품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기에 시바 료타로는 소설을 쓸 때 실존 인물들과 함께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취재를 했다고 하는데, 항상 농담을 하며 웃고 있던 밝은 분위기의 사람이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기에 신선조 내부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특히 3단 찌르기 기술이 전매특허로 상대방은 한번 찔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세 번 찔렸다는 묘사가 있지만 소설상의 표현일 것으로 생각된다. 

 

바람의검심

 

메이지 유신 시대까지 살아남은 2번대 조장 나가쿠라 신파치는 오키타 소지를 평가할 때 "히지카타 토시조, 이노우에 겐자부로, 토도 헤이스케 등 모두 죽도를 들면 어린애 취급 받았다. 진심으로 싸웠다면 곤도 이사미도 당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오키타의 검은 맹자의 검, 사이토의 검은 무적의 검"이라고 평했다. 물론 오키타 소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한 말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만큼 소지의 검술이 뛰어났다는 것으로 보인다. 

 

바람의 검심(세타 소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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