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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史:)근-현대시대

김주열 열사와 4.19 혁명

by 알풀레드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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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추악한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던 시기로 정권 유지를 위해 정치 깡패들이 활개 치던 야만의 시대였다. 우리에게 야인시대 등 대한민국 주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정재 역시 자유당의 정치 깡패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고, 진보당 사건을 통해 조봉암에 대한 사법살인을 일으키는 등 불법을 자행했다. 

 

출처. 커뮤니티 사이트(좌: 이승만, 우: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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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60년 3월 4기 대선에서 이기붕이 출마한 부통령 선거에서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이에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부산, 대구를 거쳐 서울로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특히 마산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신은 유기되었고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분노를 받아 침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4.19 혁명으로 불린다. 

 

출처. 커뮤니티 사이트(김주열)

 

김주열은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출신으로 알려졌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비교적 김주열 열사의 사진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어머니 권 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으로 김주열은 영남지방과 인연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하였다.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를 했고,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짐에 따라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은행원이 되는 것을 목표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시 원서를 냈다. 

 

출처. KBS

 

1960년 3월 14일은 합격자 발표 예정일로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당시 마산은 3.15 부정선거로 인해 군중들이 모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를 연기했다고 한다. 김주열은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마산상업고등학교 합격한 것을 확인하였으나 곧바로 고향으로 가지 않고 마산에 머물렀다. 

 

출처. KBS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민주당원으로서 자유당의 부정 선거에 대해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 부정선거가 들통하게 됨에 따라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하였는데, 이모할머니는 형제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형제는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날 이후 김주열은 돌아오지 못했다. 

 

출처. 커뮤니티 사이트

 

당시 경찰은 시위대를 분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했다.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기 때문에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이라고 안내문까지 써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했다. 김주열의 실종은 이러한 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주열 열사가 실종된 후 어머니 권씨는 한 달 동안 마산 거리를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김주열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에 김주열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저수지의 물을 퍼낸 후 시신을 찾는 일까지 발생했다. 

 

출처. EBS 스토리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다 앞다바에 떠올랐다. 김주열의 시신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 발포 이후 시신을 거두기 위해 논의를 했고, 서장에게 보고 후 시신을 바다에 버린 것이다. 당시 바다가 매우 차가웠기 때문에 김주열의 시신은 부페하지 않았고, 최루탄이 박힌 모습이 적나라하게 사진에 담겼다. 

 

출처. 커뮤니티 사이트

 

김주열의 처참한 모습이 특종으로 보도됨에 따라 마산 시민들은 그야말로 분노했다. 마산 시민들은 김주열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도립 마산병원으로 향했고, 학생들이 가장 먼저 살인 선거를 물리치자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4월 11일 마산상고, 마산고, 마산여고, 성지여고 등이 의거했고, 아들을 잃은 슬픔을 공감한 중년 여성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민들은 파출소와 경찰서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고, 경찰과 시위대 간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시민이 사망했다.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고, 정부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었다면서 언론에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를 했다. 

 

출처. 커뮤니티 사이트

 

하지만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에서 일어났고, 4월 19일 화요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발생하자 정부는 당황했다. 이날 시위에서 100여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또한, 자유당을 지지하던 정치 깡패들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부분에서도 큰 분노를 느낀 교수 등의 지식인들이 들고일어났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독재 정권 타도의 도화선이 되었고, 민주주의 투쟁에 희생된 민주열사로 추앙받고 있다. 

 

출처.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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