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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史:)근-현대시대

1987 이한열 열사와 6.10 민주항쟁

by 알풀레드 2022.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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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화제가 되었다. 김주열 열사는 최루탄 피격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그 후 또 다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한열 열사에 대해 알아보자. 이한열 열사 역시 최루탄 피격으로 후두부에 맞아 사망함에 따라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에 의해 군사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화 1987에서도 잘생긴 대학생으로 등장하여 팬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출처. 나무위키(좌: 김주열 열사, 우: 이한열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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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 배경

198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의 하나회가 신군부를 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찬탈한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으나, 신군부의 압박으로 8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국민들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끝난 상황에서 신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됨에 따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1980.09~1981) 한 후 잇달아 제12대 대통령에 취임(1981~1988)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했다. 그리고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 간접 선거 조항을 사수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부정부패와 민주화운동탄압, 고문 등 인권유린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이 커졌고,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출처. 고고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2. 이한열 열사 생애

이러한 독재 정권 하에 김주열 열사는 민주 항쟁에 앞장섰다. 1966년 전라남도 화순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김주열 열사는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80년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던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목격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가슴 한편에 신군부에 대한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고, 이후 1986년 재수 끝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당시 중앙 동아리인 '만화사랑'을 창설하여 본격적인 운동권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이 서클을 만드는 행위를 엄격히 통제를 하였기 때문에 만화나 음악 등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을 했다. 

 

출처. 영화 1987

 

이한열은 영화 1987에 등장한 강동원같이 잘생긴 선배였다고 한다. 또한,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책을 읽고 시도 썼던 엄친아였다고 한다. 이에 자신의 고민을 담은 글과 그림을 많이 섰다고 하며 지금까지 남아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게'살고자 했으며, 섣부르게 나서는 대신 조심스럽고 진중했다고 한다. 

 

출처. 이한열기념사업회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날 시위를 진압하러 온 전투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여 해산시키려고 했다. 앞서 김한열 열사를 사망하게 한 것처럼 최루탄을 직사 하였고, 이 최루탄 이한열의 뒷머리에 맞았다. 이에 이한열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고,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을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갔다. 

 

출처. 나무위키

 

이한열의 부상을 본 학생들은 즉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고, 이한열은 병원에서 "내일 시청에 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남긴 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25일 만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7년 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 역시 최루탄에 사망을 했고, 이한열 열사 역시 최루탄에 사망을 함에 따라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출처. 나무위키(중: 우상호, 우: 우현)

 

3. 6.10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망 사건을 일으킨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특히 이한열 열사가 뇌사판정을 받았던 날은 운동권 학생들이 병원을 찾아가 중환자실을 지켰다고 한다. 다음날 6월 10일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된다. 이날 시위에는 30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까지 참여하였고, 정부는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다양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방해 공작은 오히려 일반 시민들까지 시위에 참여하도록 만들었고, 시간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시위가 번졌다. 시위가 6월 중순으로 접어들게 되자 공권력을 동원하는데 한계를 느낀 정부는 점차 궁지에 몰렸다. 이에 전두환은 군부를 동원하여 국민들을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한국의 정치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여긴 미국이 군대 동원에 대해 반대하였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 속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선택했다. 야당 대표인 김영삼은 직선제를 요구하였고, 6.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을 함에 따라 정두환 정권이 몰락하게 된다. 당시 시민과 학생은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였고, 전두환 완전 퇴진을 위해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갔다. 6월 항쟁의 결과는 대한민국 역사상 9번째로 개헌이 이루어졌고,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었다. 무력을 앞세운 전두환 정권을 굴복시키고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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